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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그린 가장 솔직한 전쟁 이야기, 맨발의 겐

by colorcombination 20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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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 애니메이션 장면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이자 만화가 나카자와 케이이치가 자신의 상흔으로 빚은 『맨발의 겐』은 전쟁의 추상적 비극을 일상의 붕괴와 몸의 고통으로 번역해낸 작품이다. 과장되지 않은 선, 거칠지만 집요한 시선, 불편할 만큼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독자는 평화의 가치를 감상이 아닌 현실 감각으로 체득하게 된다. 이 글은 작가, 원폭 묘사, 교훈의 세 축으로 작품을 깊게 읽는다.

나카자와 케이이치, ‘작가’의 생애와 증언으로 읽는 ‘겐’

나카자와 케이이치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겪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여동생, 남동생을 잃고, 잿빛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맨발의 겐』은 그 개인적 상흔을 ‘겐’이라는 분신을 통해 기록한 작업이자, 침묵 속에서 지워지던 기억을 다시 사회로 밀어 올린 증언문학이다. 작화는 매끈하지 않다. 굵은 선과 과감한 데포르메, 과장된 표정은 쇼크를 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목격자가 기억을 붙잡기 위해 선택한 시각 언어로 보인다. 겐의 아버지가 군국주의에 맞서 발언하다가 탄압받는 장면, 전시 배급과 굶주림에 휩쓸리는 서민의 일상은 작가가 목격한 ‘전쟁의 구조’를 해부한다. 나카자와는 피해자성에 머물지 않고,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 침략, 언론 통제, 교육의 획일화를 꾸준히 비판한다. 그래서 『겐』은 단순한 피해 기록이 아니라 자기 반성과 사회 비판을 결합한 내적 고발장이다. 또한 그는 유머를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생선 머리를 두고 벌이는 실랑이, 무너진 집터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대사 등은 비극을 희화화하려는 게 아니라, 견디기 위한 인간의 탄성(resilience)을 보여준다. 이 유머가 있기 때문에 작품은 비통함 속에서도 독자를 끝까지 붙든다. 연재 당시부터 작가는 검열과 지역 사회의 반발을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장기 연재를 지속하며 자신만의 서사 밀도를 쌓아 올렸다. 이 꾸준함은 ‘예술가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겐』의 설득력은 사실 여부를 넘어서, 살아남은 자가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책임, 그리고 말하는 방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서 나온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상품화하지 않으면서도 대중 매체의 힘을 최대한 끌어안았다. 이 균형감이 『겐』을 기록이자 대중 서사로 만든 핵심이다.

히로시마 ‘원폭’의 현실 묘사: 장면, 사실성, 논쟁

『맨발의 겐』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원폭 투하 직후의 묘사다. 살갗이 녹아내린 사람들, 검게 그을린 그림자, 물을 찾아 비틀거리는 행렬, 타들어 가는 머리카락과 살 냄새. 만화라는 매체는 색을 절제하고 선을 강조해, 충격을 과장하기보다 ‘보게 만든다’. 특히 눈동자의 공허함과 손의 뒤틀림 같은 디테일은 문장으로 설명할 때보다 즉각적이다. 사실성은 기록 사진, 의학 보고와 교차될 때 더욱 강해지는데, 나카자와는 생존자의 구술과 자신의 체험을 합쳐 장면을 구성한다. 다만 이 사실성은 때때로 독서 토론에서 논쟁을 부른다. 어린 독자에게 너무 잔혹한 것이 아닌가, 특정 장면이 혐오를 유발해 학습 효과를 떨어뜨리는 건 아닌가 같은 우려가 그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노리는 것은 ‘충격 소비’가 아니다. 물 한 그릇을 나누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행렬 옆에서, 겐은 물을 건네는 일이 때로는 생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 한 컵의 윤리, 구호의 우선순위, 공동체가 붕괴한 뒤에도 유지되어야 할 최소한의 규칙을 장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잔혹 묘사는 윤리 교육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작품은 방사능 후유증, 낙인, 유전적 공포 같은 ‘폭발 이후의 시간’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원폭은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의 이름이며, 겐과 주변 인물들의 삶은 그 시간의 끈질김을 증명한다. 논쟁은 필요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시각적·윤리적 질문—국가폭력과 과학기술, 민간인의 보호, 책임의 분배—은 교육적 장에서 충분히 다뤄질 가치가 있다. 나카자와는 일본의 가해 역사 역시 피해 서사 안에서 비껴가지 않도록 암시를 남긴다. 폭심지의 참상을 그리면서도, 왜 전쟁이 여기까지 왔는지, 누가 무엇을 묵인했는지 묻는 것이다. 원폭 장면은 단지 울림을 주는 이미지가 아니라, 질문을 시작하게 하는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교훈’과 오늘의 독서 가이드: 학교, 가정, 시민을 위한 읽기

『맨발의 겐』의 교훈은 평화를 외치는 구호에서 끝나지 않는다. 첫째, 개인 차원의 윤리: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도 타인을 돕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을 구체적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 교훈은 재난 대비 교육이나 시민 윤리 수업에서 현실 과제로 번역될 수 있다. 둘째, 제도 비판의 필요: 작품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맹목적 동원의 결과를 반복해서 보여주며, 비판적 사고가 생존 전략임을 가르친다. 토론 활동으로는 ‘명령 불복종의 윤리’를 사례별로 나눠 검토하게 할 수 있다. 셋째, 미디어 리터러시: 만화라는 형식이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전파하는지, 이미지의 힘과 한계를 함께 분석하면 학생들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료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가정에서는 연령에 따른 동반 읽기를 권한다. 초등 고학년은 선택된 장면 중심의 발췌 읽기와 질문 카드(“겐은 왜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를, 중·고등 학생은 전권 정독과 역사 자료 대조 활동을 병행하면 좋다. 시민 독자로서는 지역 박물관·평화기념관 방문, 피폭자 구술 아카이브와의 연계 학습, 현재의 국제 분쟁 뉴스를 비판적으로 읽는 실천으로 교훈을 확장할 수 있다. 또한 작품의 한계—가해 서사의 부족, 젠더 관점의 미흡함, 트라우마 묘사의 윤리—를 토론 주제로 삼으면, ‘겐’은 성역이 아니라 대화의 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추천 독서법: ① 1권을 읽으며 인물 관계도와 타임라인을 만든다. ② 원폭 장면에서 느낀 감정을 ‘사실·감정·판단’으로 분리해 적는다. ③ 이후 권에서는 생존 이후의 사회 구조(노동, 차별, 교육)를 키워드로 추적한다. 이렇게 읽으면 교훈은 눈물에 머물지 않고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진다.

『맨발의 겐』은 한 개인의 생존담을 넘어, 국가와 전쟁, 공동체 윤리를 입체적으로 묻는 증언 만화다. 작가의 삶, 원폭의 현실, 오늘의 교훈을 함께 읽어야 작품이 온전히 보인다. 가능하다면 가족·학교·지역에서 대화의 장을 열어 보자. 다음 독서로 전쟁·평화 서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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